1937년 4월17일, 작가 이상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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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reo 작성일25-04-17 07:47 조회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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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4월17일, 작가 이상 요절
1937년 4월17일, 작가 이상 요절[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이상(본명 김해경)의 학창시절 모습/사진=뉴시스(출처 문학사상)"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 소설 '날개' 첫 문장)88년 전 오늘, 1937년 4월17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스물여섯이었다. 요절한 천재 예술가를 언급할 때 늘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이상은 난해한 작품으로 문학계에 충격을 줬다. 시 '오감도', 소설 '날개'가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전위예술) 작가로 평가받는다.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한 이상의 생애는 내내 일제강점기였다. 민족 수난의 시대, 그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폐병으로 고통받던 그는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상 '오감도' 육필원고/사진=뉴시스 ━천재 건축학도에서 천재 작가로━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부모를 떠나 큰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앨범에서 평생의 필명이 된 이상(李箱)이란 이름을 처음 썼다. 학창시절 별명이었다는 설, 건축 일을 할 때 공사장 인부들이 이름을 몰라 이상(이씨)이라고 불렀다는 설, 선물 받은 미술도구가 오얏나무 상자였는데 이에 감격해 이름 붙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그는 원래 천재적인 건축학도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했다.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33년 각혈 증상이 계속돼 일을 그만두고 쉬다가 서울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렸다. 이때 박태원, 김기림,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문학단체 구인회에 가입했다. 이 인연으로 이상은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난해해" 독자 거센 항의에 연재 중단 사태━이상은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잡지 '조선'에 장편소설 '12월12일'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여러 작품을 '조선과 건축' 등에 발표했다. 그는 작품을 낼 때마다 문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형식과 틀을 완전히 깨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고 내용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 '1937년 4월17일, 작가 이상 요절[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이상(본명 김해경)의 학창시절 모습/사진=뉴시스(출처 문학사상)"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 소설 '날개' 첫 문장)88년 전 오늘, 1937년 4월17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스물여섯이었다. 요절한 천재 예술가를 언급할 때 늘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이상은 난해한 작품으로 문학계에 충격을 줬다. 시 '오감도', 소설 '날개'가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전위예술) 작가로 평가받는다.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한 이상의 생애는 내내 일제강점기였다. 민족 수난의 시대, 그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폐병으로 고통받던 그는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상 '오감도' 육필원고/사진=뉴시스 ━천재 건축학도에서 천재 작가로━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부터 부모를 떠나 큰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앨범에서 평생의 필명이 된 이상(李箱)이란 이름을 처음 썼다. 학창시절 별명이었다는 설, 건축 일을 할 때 공사장 인부들이 이름을 몰라 이상(이씨)이라고 불렀다는 설, 선물 받은 미술도구가 오얏나무 상자였는데 이에 감격해 이름 붙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그는 원래 천재적인 건축학도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했다.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33년 각혈 증상이 계속돼 일을 그만두고 쉬다가 서울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렸다. 이때 박태원, 김기림,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문학단체 구인회에 가입했다. 이 인연으로 이상은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난해해" 독자 거센 항의에 연재 중단 사태━이상은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잡지 '조선'에 장편소설 '12월12일'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여러 작품을 '조선과 건축' 등에 발표했다. 그는 작품을 낼 때마다 문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형식과 틀을 완전히 깨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고 내용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을 때 충격이 컸다. 독자들의 항의가 거세 연재를 중단할 정도였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같은 문장이 숫자만 바꿔서 계속 반복되는 등 내용이 난해하고 띄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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