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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화랑과 승군의 후예들의 제20회 골굴사 전통무예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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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avan 작성일24-10-16 23:14 조회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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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고구려$ 2024.9.12(목) - 10.13(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화, 목, 금, 일: 10 - 18 수, 토 : 10 - 21 (월 휴관)● 무료(덕수궁 입장료 1,000원 별도)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수집’은 조사연구, 전시, 보존, 교육, 출판 등 미술관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미술관의 근간이 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수집 방식으로는 ‘구입’과 ‘기증(또는 수증(受贈))’ 외에 ‘관리전환’이 있습니다. ‘관리전환’이란 정부기관, 공공기관이 소장한 미술작품을 해당 기관의 요청에 따라 미술관이 관리를 이관 받아 소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2023년 12월 기준) 관리전환된 작품은 미술관 전체 소장품 11,560점 가운데 217점(미술자료 별도)으로 1.87%를 차지합니다. 이번 전시는 2012년 “정부기관에서 취득, 관리하던 미술품을 보다 전문적,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정부미술은행이 설립되기 이전, 미술관으로 관리전환된 작품과 미술자료 일부를 소개합니다.​작품의 출처 또는 소장이력(provenance)은 작품의 진위를 확인하는데 유효하고 작품 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작가의 삶, 작품 자체의 미적 가치와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최근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말해주듯, 유명 소장가의 소장품은 그/그녀의 안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품의 가치를 높입니다. 소장가가 개인이 아니라 정부기관일 경우, 소장 이력은 작품의 질적 가치는 물론 작품을 둘러싼 시대적, 사회적 맥락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관리전환 소장품은 구입 소장품만큼 미술관의 소장 정책이나 의도를 직접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기 전 국가가 미술계 진흥, 국민의 문화향유권 제고 등을 위해 지원, 구입한 작품인 만큼 한국 근현대사 및 미술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관리전환​국가의 물품을 취득, 보관, 사용 및 처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는 물품관리법에 기준함. 물품관리관이 물품의 효율적인 사용과 처분을 위하여 필요한 때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소속 중앙관서장의 승인을 얻어 그 관리하는 물품을 다른 물품관리관의 소관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함.​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1,560점(2023년 12월 기준)구입 4,914점(42.5%) 기준 6.429점(55.6%) 관리전환 217점(19%)1. 구상에서 추상으로From Figurative to Abstract​국립현대미술관은 1980년대부터 정부 소장 미술작품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 1990년대 초반 두 차례에 걸쳐 120여 곳의 소장품 5,400여 점의 실태를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기관 및 공공기관 소장 미술작품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조달청에 의해 '정부미술품 보관관리규정'이제정되면서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조달청은 1998년 ;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정부기관 미술작품은 구입보다 기증 형태로 소장되고 해당 기관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국유재산법, 물품관리법 등 어느 법령에도 해당되지 않아 관리가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정부기관 소장 미술품은 문화적, 예술적, 경제적 가치가 있는 국가재산임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정부미술품 관리 규정이 제정되기 전부터, 작품의 훼손과 유실을 막고 전문기관이 작품을 효율적,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전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일부 기관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관리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10월 경복궁 내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1972)인데, 관리전환도 이 무렵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 즉 정부가 주최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모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 위해 설립되자, 그때까지 국전을 주관하던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소장한 국전 수상작 및 출품작이 이관된 경우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1986년 과천관 개관 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동시대미술과 민중미술, 해외미술보다 조선미술전람회 및 국전 수상작 등 소위 제도권 작가의 작품을 주로 구입했는데, 관리전환된 소장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장우성,1935, 비단에 먹, 색, 조달청 관리전환(1998)월전(月田) 장우성(1912~2005)은 부산고구려$ 김은호를 사사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창덕궁상 등 여러 차례 수상하며 젊은 시절부터 큰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세밀한 필치의 채색화를 주로 제작하였으나 1940년대부터 전통 문인화의 정신과 형식을 계승하며 사의적이고 간결한 수묵담채풍 작품을 선보였다. 소와 함께 귀가하는 어린 목동을 그린 ;(1998) 출품 후, 미술작품은 전문기관에서 관리하는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 1998년 조달청으로부터 관리전환되었다.이영일, 1928, 비단에 색, 창덕궁 관리전환(1975)춘천(春泉) 이영일(1905~1984)은 1920년대에 일본에서 유학하며 1925년 제4회 ;(1972)을 계기로 관리전환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3호로 지 정되었다.작가미상,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81).작가미상,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81).작가미상,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81).작가미상,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81).작가미상,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81).이마동, 1931,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75)청구(靑鳩) 이마동(1906~1981)은 한국의 1세대 서양화가인 고희동, 이한복 등을 사사한 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유학하며 여러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 세계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나눌 수 있는데 1960년대 이전은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 이후는 점묘법을 적용한 다채로운 색감의 작품을 선보였다. 1932년 제11회 ;는 작가의 전기 경향을 대 표하는 작품으로 어두운 색채와 명암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인물이 입고 있는 양복과 잡지를 말아 들고 있는 모습은 근대 지식인 남성상을 보여준다.심형구, 1939,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75)이갑경, 1937, 캔버스에 유화 물감, 창덕궁 관리전환(1981).김주경, 1927, 캔버스에 유화물감 창덕궁관리전환(1961)김주경(1902-1961)은 도쿄미술학교 출신으로 인상주의 화풍의 작품 세계를 전개한 동시에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의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1947년 월북해 평양미술학교 초대 교장이 되었다. 특선작으로 전시 직후 이왕가에 의해 구입 및 보관되어 오다 1970년대 창덕궁의 한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소장처를 옮겼다.김인승, 1954, 캔버스에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5)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출신의 지연(智淵) 김인승(1911~ 2001)은 한국 아카데미즘 화풍의 전통을 확립한 작가다. 1937년 제16회 ;에 출품한 작품으로 전통 한복을 입은 단아한 모습의 여성 모티프로 한다. 안정된 구성과 절제된 채색은 차분한 인상을 주지만 의상에 활용된 원색과 중앙의 빨간 부채로 경쾌한 느낌을 냈다. 이 작품은 1985년 대통령비서실로부터 관리전환된 것으로 캔버스 뒤 라벨에는 '4287년(1954년) 성탄 국회의장 이기붕 증정'이라 쓰여 있다. 이로써 작품은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이 입수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으로 추측된다.박석환, 1965, 캔버스에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5)손순영 문공부장관상 수상,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3)손순영 문공부장관상 수상,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3)전뢰진, 1957, 화강석, 국립중앙극장(현 국립극장) 관리전환(1992)홍익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전뢰진(1929~)은 평생 화강암, 대리석을 재료 삼아 조각에 전념했다. 초기에는 인물상을 주로 제작하였으나 점차 자연과 사람의 융화를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1957년 제6회 ;에서 볼 수 있는 환조와 부조, 도식적인 형태는 전뢰진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중요 미술품의 효율적인 관리 보존 및 활용을 위해 전문 기관에서 직접 관리함을 이유로 1992년 국립 중앙극장으로부터 관리전환되었다.유영교, 1974, 대리석,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4)유영교(1946~2006)는 홍익대학교 조소과 졸업 후 이탈리아 국립 로마미술아카데미와 대리석의 산지인 토스카나 카라라에서 수학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1987년 영구 귀국하여 한국에서 활동했다. 작가는 대학원 시절에 1973년 제22회 ;은 여인이 바다로 추락하는 모습을 바다와 여성의 인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형상화하여 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였다.송용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청와대 관리전환(2002)김창락, 1962, 캔버스에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5)문원(文園) 김창락(1925~1989)은 대구 출신 화가 서진달에게 유화를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4년 무사시노 부산고구려$ 미술대학 유화과를 졸업했다. 1961년 제10회 ;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특전으로 2년간 파리에서 수학했다. 국전 추천작가, 심사위원을 지냈고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으로 따뜻한 색채와 부드러운 필치가 서정적이고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아버지에 대한 정감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박기태, 1974, 종이에 수채물감, 파스텔,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5)박기태(1927~2012)는 경주예술학교에서 손일봉을 사사하고 수채화를 재료로 한 인물화를 주로 제작했다. 50대에 프랑스로 건너가 아카데미 드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de la Grande Chaumière)에서에서 수학했다. 입선작으로 불투명 수채화 기법을 토대로 즉각적이고 활달한 필치로 인물을 표현했으며 화사한 색감의 노란 양산과 빈 배경은 인물과 대비가 되어 그림을 보다 선명하게 만든다.손응성, 1972, 캔버스에 유화 물감, 청와대 관리전환(2002)손응성, 1970년대, 캔버스에 유화 물감, 청와대 관리전환(2002)손응성(1916~1979)은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1970년대)와 함께 2002년 청와대로부터 관리전환되었다.김진명 대통령상 수상, 청와대 관리전환(1987)장두건 1975, 캔버스에 유화 물감,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리전환(1976)박영성, 1974, 캔버스에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4). 1974, oil paint on canvas, management박영성(1928~1996)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도자기, 유물, 민속품 등 향토적인 정물을 소재로 삼은 정물 화를 주로 그렸다. 특히 한국수채화협회 창립을 주도하는 등 수채화를 즐겨 제작했다. 대통령상 수상작으로, 대통령비서실에서 소장하다 1984년 우수미술작품 8점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하면서 미술관으로 소장처를 옮겼다. 중국식 청동기, 일본식 자기, 한국의 고가구, 곰방대와 화살촉, 조류 박제 등 옛 기물과 오브제들을 한 화면에 배치시키고 과감한 부감법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군데군데 거친 붓질을 사용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김숙진,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4)김숙진(1931~)은 1957년 제6회 ;은 작가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한국적, 전통적 소재 정 물화, 인물화가 다수 제작된 1970년대 시대상을 보여준다. 문화공보부가 창작활동 지원책 일환으로 구입한 이 작품은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되었다.장두건 1964,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감사원 관리전환(2002)초헌(草) 장두건(1918~2015)은 특유의 미감이 가미된 사실주의 화풍의 작품 세계를 펼쳤다. 작가는 일본 다이헤이요 (太平洋)미술학교에서 회화를, 메이지(明治)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서울사대부중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57년 도불하였다. 1959년에는 프랑스의 관전 르 살롱(Le Salon)의 유화 부문에서 내려다 본 식탁&gt(1958)로 동상을 수상했다. 귀국 후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98)에서 감사원 소장품으로 선보인 바 있으며 2002년 관리전환되었다.김원, 1961, 캔버스에 유화 물감,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관리전환(2007)김원(1912~1994)은 평양 출신으로 일본 데이코쿠(帝國) 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하고 광복 후 평양에서 교사로 있다 1947년에 월남하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선했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추천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작가는 유학 시절에 접한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화풍을 형성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 등을 표현하는 것에 천착했다.;(1972) 출품 후 미술관에 위탁되었다가 2007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관리전환되었다.류경채, 1949, 캔버스에 유화 물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증(1987)류경채(1920~1995)는 일본 료큐인샤(綠陰社) 화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미전으로 등당했다. 이화여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한 작가는 구상에서 비구상, 추상으로 전환해가면서도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와 같은 국전 수상작 대량과 함께 1987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최영림 1959, 캔버스에 유화 물감,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증(1987)평양 출신 최영림(1916~1985)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 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과 함께 수도여자사범대학교,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1950년대의 '흑색 시기'를 시작으로 한국적 정서를 모래와 흙을 사용해 표현한 1960년대의 '황토색 시기', 부산고구려$ 한국의 설화와 전설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1960년대 후반의 '설화 시기'로 이어진다. 문교부장관상 수상 작으로 1950년대 흑색 시기의 대표작이다. 어두운 색채와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된 반추상형태의 여인들의 모습으로 전쟁의 참상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이림 1965, 캔버스에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4)이림(1917~1983)은 박광진에게 유화를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데이코쿠(帝國)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40세까지 고향인 마산에 머물며 농어촌의 삶과 풍경, 일상적 사물을 소재로 한 구상 회화를 주로 제작했으나 1959년 서울에 정착한 이후 추상화로 선회했는데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급변하는 시대와 맞물려 작품 경향이 변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전 수상작으로 대통령비서실에서 소장하다 1984년 10월 우수미술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하면서 소장하게 되었다.박상옥 1958, 캔버스에 유화 물감,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관리전환(2007)박상옥(1915~1968)은 1939년 일본 데이코쿠(帝國)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재야전인 ;(1972) 출품 후 미술관에 위탁되었다가, 체계적인 관리와 대국민 관람 서비스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2007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관리전환되었다.정창섭, 1962, 캔버스에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4)박서보 1964, 캔버스에 유화 물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관리전환(1973)박서보(1931~2023)는 앵포르멜,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변화를 선도하며 독보적인 화업을 일군 작가다. 원형질(原形質)은 살아 있는 세포에 들어 있는 유동성 물질을 뜻하는 말로 생명 활동에 기초가 된다. 작가는 1960년대 초부터 원형질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 미술평론가가 박서보의 원형질 연작이 절규하는 인간의 영상이라 평했듯, ;은 전쟁의 상흔, 젊은 세대의 절규, 허무, 항변이자 생존에 대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反국전을 내세운 젊은 앵포르멜 작가들은 제도권에 곧 편입되었고, 국제비엔날레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박길웅 1969, 캔버스 유화 물감, 대통령비서실 관리전환(1984).창, 칼 등의 토속적인 오브제에서 얻은 영감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박길웅(1941~1977)은 ;(1965) 등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되었다.황창배 1978, 마에 먹,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9).황창배(1947~2001)는 신비로운 원의 형상과 그 주위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연기가 환상적인 인상을 주는 동양화 비구상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이듬해 문화공보부로부터 관리전환되었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장우성에게 동양화를, 이기우에게 전각과 서예를 사사하면서 충분한 기본기를 익혔다. 그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재료에서 벗어나 캔버스, 아크릴, 유화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나이프로 긁고 오려 붙이는 등 파격적인 조형 실험을 전개하며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등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한국화의 지평을 확장했다.2. 시대의 기록Records of the Times​관리전환된 작품 가운데 수묵화 및 수묵채색화가 103점(47.4%)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서양화와 서예가 각각 66점(30.4%), 35점(16.1%)으로 그 뒤를 따릅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970년대에 두드러지는데, 이는 당시 일었던 소위 '동양화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전통의 계승과 민족문화 개발을 중시했던 당시 정부의 문화정책과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1970년대에는 다양한 기관에서, 1980년대에는 주로 문화공보부와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에서 수묵화와 수묵채색화가 다수 관리전환되었는데, 1990년대 이후 그 비율이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회화가 미술시장에서 점차 소외되는 현상과도 맞물립니다.​한편 미술에 있어 전통의 계승과 민족적 정체성 확립은 민족기록화, 새마을기록화, 선현 영정 등 제작으로도 구현되었고, 다양한 정부기관에 이관된 이들 작품이 미술관에 작품 또는 미술자료로 관리전환되었습니다. 1967년 경복궁미술관에서 ;이 열렸고, 1973년 '기록화 5개년 계획'이 발표된 이래 명장名將 전승戰勝, 성군聖君의 치적, 애국선열의 위업 등 역사적 사건을 회화화하는 대규모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화가들에게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제개발 및 발전상을 그리도록 주문했습니다. 또한 1973년 실시된 위인들의 초상 표준화 사업 계획의 일환으로 1980년대 초부터 표준영정이 문화공보부로부터 관리전환되었습니다.배렴, 1930년대 후반, 비단에 먹, 색, 국립중앙박물관 부산고구려$ 관리전환(2013)제당(霽堂) 배렴(1911~1968)은 한학을 공부한 뒤 이상범의 청전화숙에서 수학했다. 해방 후에는 이응노, 장우성 등 과 함께 새로운 전통회화를 모색하고자 한 '단구미술원'을 결성했다. 복숭아꽃이 만발한 산속의 봄 풍경을 그린 ;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었으나 박물관, 미술관의 소장품 성격의 재정립 필요성과 근대미술 연구 및 전시의 일원화를 위해 2013년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되었다.고희동, 1941, 종이에 먹,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5)춘곡(春谷) 고희동(1886~1965)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다. 고희동은 안중식 문하에서 전통 회화를 익히다 일본 유학(도쿄미술학교)을 계기로 서양화를 한국에 도입했는데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다시 동양화가로 전향했다. 가을 풍경을 쏠쏠하게 담아낸 ;는 미점(米點)과 피마준(披麻皴)과 같은 전통적인 화법을 반영하면서 근경은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서양화법과 동양화의 절충을 시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서희환, 1969, 종이에 먹,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0).소전 손재형을 사사한 평보(平步) 서희환(1934~1995)은 1968년 제17회 ;는 한글의 고졸미와 생동감을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이상범, 1954, 종이에 먹, 색, 국립극장 관리전환(1977)서화미술회에서 서화를 수학한 청전(靑田) 이상범(1897~ 1972)은 1922년 제1회 ;(1974)과 상호 관 리전환(교환)되어 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작품이다.장우성, 연도미상, 종이에 먹,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0)월전 장우성(1912~2005)은 1960년대 이후 사군자화를 주로 제작했는데 매, 난, 국, 죽 외에도 장미와 진달래 등을 주제로 삼아 그렸다. 화사한 색감으로 표현된 꽃과 식물에 생기가 넘치며 난초와 국화, 장미와 들꽃 등을 함께 그렸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작품의 우측 하단에는 낙관이, 좌측 상단에는 사계절의 꽃과 열매를 함께 그린 그림이라는 뜻의 '사계군방도(四季群芳圖)'가 화제와 함께 쓰여있다.박승무, 1974, 종이에 먹, 색, 국립중앙극장(현 국립극장) 관리전환(1992)심향(心香) 박승무 (1893~1980)는 안중식과 조석진을 사사하고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 등에 출품하며 활동했다. 한국전쟁 이후 대전에 정착했다. 야산의 겨울 풍경을 모티프로 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눈 덮인 초가집과 나무의 사실적인 묘사와 비교해 배경이 되는 산의 표현은 남종화의 전통을 보여준다. 1977년 국립극장이 소장한 이상범의 ;와 상호 교환하였다가 1992년 미술관에 다시 관리전환되었다.민경갑, 1977, 종이에 먹,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0)바위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는 화려한 색감의 연산홍은 완연한 봄의 기운을 풍긴다. 이 작품은 전통회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조형실험을 전개한 유산(酉山) 민경갑(1933~2018)의 뛰어난 기본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유산은 1970년대 이후 전통적인 수묵 담채와 진채의 구분을 넘어선 특유의 발묵, 발색 기법을 바탕으로 대자연의 섭리와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본래 재무부(현 기획재정부)가 인수했던 작품으로 1980년 4월 허백련, 노수현 등의 작품을 포함한 89점이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하면서 소장하게 되었다.금동원 1965, 종이에 수묵담채, 한국관광공사 기증(2000, 미술자료)김정현, 1961, 한지에 먹, 색,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관리전환(2007)소송(小松) 김정현(1915~1976)은 독학으로 서양화를 수학하다 허백련에게 전통 회화를 배웠다. 그는 전통적인 수묵채 색화에 다양한 표현 방식을 적용하여 현대적으로 변화시킨 작가는 농촌 풍경을 즐겨 그렸다. 화면을 가득 채운 나무는 전통 산수화의 형식과 구도를 벗어나고 있으며 작가는 먹이 번지는 효과를 이용해 나무와 낙엽, 가지 등을 단순화시켰다. 향토적인 동시에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보다 체계적인 미술품 관리와 전시를 위해 2007년 문화재청 (현 국가유산청)에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된 100여 점의 작품 중 하나이다.천칠봉, 1975, 캔버스에 유화 물감, 국립극장 관리전환(1992)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을 하며 소위 '국전파'로 불리는 천칠봉(1920~1984)은 독학으로 서양화를 익 혔으며, 사생을 바탕으로 한 구상 작품을 주로 그렸다. 손응성, 변시지 등과 함께 창덕궁 후원을 즐겨 그려 '비원파'라 불 리기도 한다. 백운대는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로 작가는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 가을 산의 모습을 부산고구려$ 아카데믹한 기법을 토대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했다. 이 작품처럼 한국적 정취가 담긴 풍경화 외에도 ;(1975, 새마을운동중앙회 소장) 등의 민족기 록화도 다수 제작하였다.천칠봉 1974, 캔버스에 유화물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4)박광진 1975, 캔버스에 유화물감, 국립중앙극장(현 국립극장) 관리전환(1992)김태, 1975, 캔버스에 유화 물감, 국립중앙극장(현 국립극장) 관리전환(1975)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통해 등단한 김태(1931~2021)는 평양미술대학 재학 중 월남하여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추상이 주류가 된 시절에도 대상의 본질적인 구조의 탐구를 계속했고 이를 구상미술로 구현했다. 어업에 종사하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부산, 속초, 인천 등의 어촌과 항구를 즐겨 그렸다. 강한 붓 터치와 두터운 마티에르를 이용해 기암괴석과 절벽으로 유명한 부산의 태종대를 표현적으로 담아냈다.박노수 1957, 한지에 먹, 색, 해외문화홍보원 관리전환(2010)남정 박노수(1927~2013)는 이상범을 사사하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1949년 제1회 ;라는 제목으로 구입 및 소장해 오다가 보관상의 이유로 201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전환되었다.조중현, 연도미상, 종이에 먹, 색, 국립중앙극장(현 국립극장) 관리전환(1992)심원(心園) 조중현(1917~1982)은 김은호를 사사하고 1938년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후소회, 백양회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새, 짐승, 물고기, 꽃 등을 수 묵 또는 수묵채색으로 즐겨 그렸다. ;은 푸른색 물감으로 선염하여 표현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아한 자태로 날갯짓하는 학 두마리를 세필로 정밀하게 묘사하였다.박래현, 1961년경, 종이에 색, 국립극장 관리전환(1981)우향(雨鄕) 박래현(1920~1976)은 일본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배우고, 재학 중 1943년 제22회 ;는 두 손을 모은 세 명의 여성과 하얀 비둘기 떼를 반(半)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직선적인 화면 분할과 수직적인 형태감은 동양화의 현대화를 추구한 작가의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서정적인 분위기 또한 풍긴다. 이 작품은 본래 국립극장에서 소장하였으나 근대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고 미술관의 상설 전시에 활용하자는 판단에 따라 1981년 다른 작품과 상호 관리 전환(교환)되었다.조석진, 1910, 종이에 수묵,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75)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은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이 자 안중식과 함께 왕의 어진을 그리는 어진도사(御眞圖寫) 에 선발되었던 화가다. 그는 갈대와 기러기를 함께 그린 노안도로 특히 유명했는데, 노안(老安)과 같은 발음으로 노후의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작가는 기러기의 머리와 몸통은 부드러운 필치로, 날개와 배경의 갈대는 거칠고 힘 있게 묘사하여 갈대로 날아드는 기러기를 생생하게 표현했다.이응노1957, 한지에 먹, 색,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관리전환(2007)대나무, 도자기, 사슴과 닭 등을 소재로 한 화훼도와 기명도를 토대로 전통 회화의 소재를 취해 그린 고암(顧庵) 이응노 (1904~1989)의 ;는 전통적인 병풍화와 달리 대상을 자유분방하고 율동감 넘치는 필선과 추상화를 통해 익살스럽고 재치 있게 묘사했다. 추상적이고 표현적인 조형 실험을 전개하기 시작한 1950년대 이응노 작품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2007년까지 문화재청에서 소장하다 미술품의 체계적인 관리와 전시 등의 대 국민 서비스를 위해 같은 해 12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관리 전환되었다.김은호 1900년대 초반, 비단에 먹, 색,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전환(2013)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는 서화미술회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을 사사하고 이른 나이에 어진 화가로 발탁되며 명성을 얻었다. 1925년 일본에 건너가 유키 소메이를 사사했다.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여기에 서양화적 사실주의와 일본학적 장식성을 가미한 새로운 양식의 인물화로 유명하다.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미술 교육자로서도 활발히 활동, 그 제자들이 1936년 후소회를 조직해 한국 근현대 수묵채색화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김은호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전통적인 문인화조도의 제보를 이으면서 석탄, 매화, 석죽, 국화, 모란, 오동나무 연 꽃, 파초, 소나무, 난초 등을 몰골법으로 그려냈다.민족기록화​1950년대부터 미술계 내부에서 국사를 기록한 역사화 제작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민족기록화'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67년 7월 부산고구려$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이다. 이 전시는 일제강점기부터 월남전까지 20세기 역사(특히 반공과 전쟁)를 주제로 삼았고, '목우회'를 중심으로 한 원로작가들뿐만 아니라 신진의 추상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1973년 국난극복의 사례를 미술작품화하여 민족의 긍지를 함양한다는 목표 아래 '기록화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열의 위업, 성군 및 명현(明賢)의 치적, 선현들의 학술적, 예술적 업적을 주제로 한 기록화를 선보일 예정이었으나, 제3공화국 당시 경제발전상을 담은 민족기록화 '경제편'이 우선 제작되어 1974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현 덕수궁관)에서 전시가 열렸다. 곧이어 호국(護國)과 전승(戰勝),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기록화가 차례로 제작, 전시되었다. 전시가 끝나고 문화공보부는 출품된 작품들을 구입해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군사령부, 국회사무처 등에 임대했다. 1979년 책임소재가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으로 이전되었다가, 1998년 소유권이 작품 주제와 관련있는 기관에 무상이전되면서 청와대,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현충사 등으로 소장처가 바뀌었다. 이 가운데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소장했던 일부가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및 미술자료로 관리전환되었다.김창락 1971, 캔버스 유화 물감, 청와대 관리전환(2002)박광진, Park Kwangjin, 1977, 캔버스에 유화 물감, 청와대 관리전환(2002, 미술자료)박광진(1935~)은 홍대 재학 시절 대학생으로서 처음으로 1957년 제6회 ;에서 수상하며 화단에 등장했다. 탄탄한 데생력을 토대로 고전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의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를 다수 제작했다. 황금 들판을 배경으로 수확에 여념이 없는 농부들을 묘사한 이 작품은 1970년대 추진된 새마을운동 으로 질서 있게 변화된 농촌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당시 정부가 추구한 농어촌 지역의 발전을 이상화하여 전달한다.박각순,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청와대 관리전환(2002)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 행주대첩, 한산대첩 등 명장(名將) 의 전승(全勝)과 구국(救國)은 민족기록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로 살수대첩은 612년, 지금의 청천강 유역인 살수 (薩水)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수나라의 결정적 전투다. 일본대학에서 서양화를 배운 박각순(1918~2004)은 목우회 회원으로 사실주의 양식의 여성 누드화로 유명하다. 그런 그 역시 전쟁을 소재로 한 민족기록화를 제작했다. ;(1975)에서 전시된 후 청와대에서 소장하다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되었다.정창섭 1971, 캔버스에 유채, 국가정보원 관리전환(2016, 미술자료)김태훈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청와대 관리전환(2002, 미술자료)정창섭, 1971, 캔버스에 유화 물감, 국가정보원 관리전환(2016, 미술자료)정창섭(1927~2011)의 ;에는 1960~70년대 국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개간 중인 농촌의 풍경이 담겨있다. 경제 발전과 산업화는 민족기록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재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에 따라 공장, 댐, 고속도로 등의 국토 건설, 새마을운동/농가소득증대, 기계공업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이 다수 제작되었다. 작가는 데생력과 구도, 이야기 전개 방식 등이 뛰어나 역사화로서 손색이 없는 다수의 역사 및 경제 소재 민족기록화를 제작했다.정창섭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청와대 관리전환(2002, 미술자료)오승우 1971, 캔버스에 유채, 청와대 관리전환(2002, 미술자료)표준영정​'표준영정'이란 민족적 추앙을 받고 있는&quot역사상 위인과 우국선열 등 선현(先賢)의 모습을 통일시킨 초상화를 말한다.「문화체육관광부 영정 • 동상 심의규정」에 따르면 표준영정'은 문화체육부장관이 영정•동상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제작한 영정을 '정부표준영정'으로 지정한 영정이다.표준영정은 1973년 4월 28일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충무공의 진영(眞影)을 통일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같은 해 5월 8일 국무총리의 지시로 '동상건립 및 영정 제작에 관한 심의 절차 공고'를 통해 실시되었다. 당시 각종 기념사업회, 사당 등 민간단체에서 제각각 영정을 제작하자 국가에서 위인의 영정을 정리, 선정하고 허가,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4년 5월 기준 총 99점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적 기록물로서 표준영정은 사적(私的) 초상화와 달리 국가가 선택한 인물에 대한 공적(公的) 기억이 되고,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이 사업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그 바탕 위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부산고구려$ 중흥을 달성하는 것을 화두로 삼았던 당시 정부의 문화 예술 정책의 단면을 보여준다.김기창, 1974, 비단에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0)운보(雲甫) 김기창(1914~2000)은 김은호를 사사하고 1931년 제10회;에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했다. 광복 이후 일본풍에서 벗어난 화풍을 모색, 1950년 대에는 아내 박래현과 함께 입체주의와 반추상을 도입한 새로운 양식의 실험하면서 점차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예술 세계를 확장했다. 채색인물화에 능했던 운보가 그린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1804-1866?)의 모습은 세밀한 얼굴 표현과 굵고 힘찬 의습선 등 전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운보는 이외에도 세종대왕, 을지문덕 등의 영정을 제작했다.채용신, 1911, 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전환(2013)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은 산수, 인물 모두 잘 그렸 는데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서 태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황제의 어진 및 구한말 우국지상의 초상을 포함해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1906년 익산으로 낙향해서도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전통화법을 계승하면서도 근대기에 수용된 서양화, 사진의 영향을 받아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초상의 주인공인 간재 전우(1841~1922)는 조선 후기 유학자로, 일제가 국권을 빼앗자 벼슬에서 사임하고 계화도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하며 국권 회복을 도모했다. 석지는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의 반듯한 자세와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표정을 통해 그의 강건한 성품을 전하고 있다.송영방 1983, 비단에 먹,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3)​우현(牛玄) 송영방(1936~2021)은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해 노수현, 장우성에게 배웠다. 우현은 산수화를 비롯해 인물화, 화조화, 사군자뿐만 아니라 불화, 삽화,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분야를 아우르면서 전통적인 화법을 토대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이 작품은 목숨을 바쳐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이차돈(506~527)의 표준영정으로, 작가는 뒷면에 색을 칠해 은은한 느낌이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적용해 단아한 청년의 모습으로 이차돈을 묘사했다.신영상, 1986, 비단에 먹,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7)최무선(1325~1395)은 고려 시대 무관으로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각종 화약과 이를 활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및 사용한 발명가다. 전통 초상화의 형식을 따르는 이 작품 속 최무선의 곧은 콧날과 예리한 눈매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짐작케 한다. 이 영정을 그린 이는 서울대학교 교수와 대한민국미국전람회 추천작가 등을 역임한 노석(老石) 신영상 (1935~2017)으로, 그는 1960년대 초 묵림회에 참가한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화의 현대화, 추상화를 실험했다. 최무선 영정은 1987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정탁영, 1984, 비단에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5)수묵 추상화가이자 서울대학교 동양화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한 백계(白溪) 정탁영(1937~2012)이 그린 일연(12061289) 의 영정이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은 고려시대의 승려로 배경의 서안과 책, 붓 등은 그의 깊은 학문적 소양을 암시하며 야윈듯한 얼굴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 승려의 기품이 드러난다. 작가는 단색을 활용하여 인물의 의복을 평면적으로 처리했고 필치의 변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굵기로 가늘게 긋는 기법인 철선묘를 사용해 옷의 주름을 묘사했다. 문화 공보부의 지원으로 정탁영이 1984년에 그리고 1985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작품이다.이종상, 1977, 비단에 색,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관리전환(1980)5천원권과 5만원권 지폐 속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영정을 제작한 일랑(一浪) 이종상(1938~)은 원효, 장보고, 우륵 등의 표준 영정과 ;에서 수상하며 등단했고 동국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고구려 미술과 문화에 천착하여 고구려 벽화의 기법과 재료를 작품에 활용하였으며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광개토대왕의 영정을 완성했다. 용포(龍袍) 대신 비늘 갑옷과 투구, 칼을 잡고 있는 호방한 광개토대왕의 모습은 북방 민족의 생김새,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정복군주의 위엄과 고구려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격변의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들을 구축해 나간 예술가들의 향연이었습니다.​변화에 대한 갈망, 끊임없는 치열한 고뇌로 만들어낸 창작물의 가치에 부산고구려$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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