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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하반기 장가계 여행 후기/7월 장가계 옷차림/(7월30일~8월3일)/장가계 여행후기/장가계 여행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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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to 작성일24-08-27 20:16 조회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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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을 부산고구려$ 찾아서 ⑬] 두우가 말한 '고구려의 옛 땅'은 어디?고구려 영토 서쪽 끝은 최소한 중국 하북성 난하 유역조하준 기자 입력 2024.08.24 10:37수정 2024.08.24 10:40각종 사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영토의 서쪽 끝은 최소한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 유역임을 알 수 있다. 두우가 『통전』에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고구려의 옛 땅 안에 있고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고 했던 것도 바로 지금의 하북성 난하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앞선 기사에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서기 3세기부터 만리장성의 기점이 됐고 그 때 중국에선 마치 진시황 때 진 장성이 거기까지 축조된 것처럼 왜곡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당나라 학자 두우(杜佑)가 쓴 『통전(通典)』이란 책에 적힌 갈석산의 기록을 통해 만리장성의 종점인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고구려의 옛 땅 안에 있었던 사실과 그 기록을 국내 사학자들이 오독한 현실도 목격했다.​앞선 기사에서 지적했지만 다시금 강조하자면 두우는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고구려의 옛 땅 안에 있다고 지적했을 뿐 그곳이 한반도 어딘가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의 저자 문성재 박사 또한 『통전』《주군8》 ‘고기주 상(古冀州上)’ 조의 기록을 인용해 두우가 언급한 그 ‘고구려의 옛 땅’이 한반도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과연 두우가 언급한 고구려의 옛 땅은 어디였을까?​현도군과 낙랑군이 요수 동쪽에 있다는 기록도 무시한 국사학계​일찍이 문성재 박사는 『통전』의 기록을 오독한 주류 국사학계 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고구려’ 하면 으레 그 동쪽 영토만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와 발해 바다가 자리 잡고 있는 남쪽을 논외로 치더라도 고구려에는 서쪽과 북쪽으로도 강역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고구려 옛 땅’은 서쪽 영토를 가리킬 개연성도 있는 것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그가 언급한 『통전』《주군8》 ‘고기주 상(古冀州上)’ 조의 기록을 보면 “현도, 낙랑 등의 군은 모두 지금의 요수 동쪽이니, 〈우공〉에서의 ‘청주’의 영역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玄菟樂浪等郡並今遼水之東宜在禹公靑州之域)”고 적혀 있다. 즉, 현도군과 낙랑군은 모두 요수 동쪽에 있다고 한 셈이다.​또 같은 책에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자르고 갈석산으로 이어진다고 했으니 결국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요수의 동쪽에 있었고 요수가 발원하는 갈석산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산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만약 주류 강단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좌갈석이란 것이 있었고 그것이 한반도 모처라면 전혀 말이 안 된다.​강단사학자들은 요수를 부산고구려$ 지금의 요하로 주장하고 있는데 요하에서 한반도로 진입하려면 동남쪽으로 가야하므로 동쪽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장성이 끝나는 갈석산이 한반도 어딘가에 있었고 두우 본인이 현장 답사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면 왜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고 적었는지도 의문이다.​만약 두우가 언급한 그 고구려의 옛 땅이 위에서 본 노태돈의 말대로 한반도 서북부였다면 “남쪽으로 압록강을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는 식으로 기록해야 더 타당하지 않을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결국 두우의 말을 곰곰이 분석해 보면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은 요수였고 그 요수에서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갈석산이 있었으며 그곳이 바로 장성의 기점이며 과거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던 곳이라고 봐야 한다.​두우는 분명히 현도군과 낙랑군은 요수 동쪽에 있었던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지 결코 한반도 평양 일대라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한반도 평양이 언제부터 요수 동쪽에 있었던가? 따라서 두우가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있는 곳이라고 언급한 ‘옛 고구려 땅’은 요수 동쪽 즉, 요동 지역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한반도 평양 일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지금까지 『한서』부터 『통전』까지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나라~당나라까지 900여 년 동안 중국인들은 모두 낙랑군은 요동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지 결코 한반도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반도 평양 타령을 하고 싶다면 평양이 언제부터 요동으로 불렸는지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두우가 말한 ‘우갈석’은 하북성 당산시 낙정현 소재​위의 기록 외에도 『통전』 곳곳을 보면 안동도호부의 기록에서도 한사군의 위치를 ‘요수의 동쪽’이라고 적고 있고 유주(幽州) 주석에도 분명히 낙랑군과 현도군의 위치에 대해 “현도, 낙랑 등의 군은 모두 오늘날 요수의 동쪽에 있으니 마땅히 우 임금 때 청주의 땅에 있었다.(玄菟樂浪等郡並今遼水之東宜在禹貢靑州之域)”고 적혀 있다. 즉, 그가 말한 ‘고구려의 옛 땅’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두우가 언급한 '우갈석'이자 사마정이 언급한 '북평의 갈석산'은 평주 노룡현 남쪽에 있다고 했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중국 하북성 당산시 낙정현에 위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이전 기사에서 언급된 『통전』 권 178 《주군(州郡)》‘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에 대한 주석을 다시 살펴보면 평주 노룡현은 한나라 요서군 비여현이었으며 갈석산이 있었고 서진 때 저술된 『태강지리지』에 적힌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이 갈석으로부터 일어난다”를 인용해 “지금 고구려의 옛 땅에 있는 부산고구려$ 것은 이 갈석이 아니다”고 했다.​또 같은 책 권 186 《변방(邊防)》 「동이」 고구려 조에는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만리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리고 두우 본인이 현장 답사를 통해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가며 유적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했다.​그 밖에 두우는 그 기록을 남기면서 주석에 『상서(尙書)』에 '우갈석(右碣石)을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고 적힌 기록을 인용하며 '우갈석은 강이 바다를 향한 곳으로서 지금의 북평군 남쪽 20여 리에 있으므로 고구려 안에 있는 것은 좌갈석(左碣石)이 된다'고 했다. 언뜻 봐서는 두 기록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일단 『태강지리지』라는 책이 현전하지 않기에 정확하게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마정과 두우 두 사람이 인용한 기록엔 모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그 갈석산에서 만리장성이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만리장성의 기점인 갈석산’은 모두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을 말하는 것이다.​이전 기사에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갈석산이란 이름의 산이 총 8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戊)의 기록이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수서』 지리지의 기록을 인용한 경(庚)의 기록이다. 이 책엔 뭐라고 적혔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수서』 권 30 지 25 지리 중 기주(冀州) 북평군(北平郡) 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다.​“북평군은 옛날엔 평주가 설치됐던 곳이다. 거느리는 현은 하나이며 호는 2,269이다. 노룡은 옛날 북평군이 설치됐던 곳으로 신창(新昌), 조선(朝鮮) 2현을 거느렸다. 후제가 조선을 폐지하고 신창에 편입시켰고 또 요서군과 속현인 해양현(海陽縣)을 폐지하고 비여(肥如)에 편입시켰다. 개황(開皇) 6년(서기 586년)에 또 비여를 없애고 신창에 편입시켰으며 18년(서기 598년)에 노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대업(大業) 초기에 북평군을 설치했다. 장성이 있고 관관(關官)이 있으며 임유궁(臨渝宮)이 있고 복주산(覆舟山)이 있으며 갈석이 있다. 현수(玄水), 노수(盧水), 온수(溫水), 윤수(閏水), 용선수(龍鮮水), 거량수(巨梁水)가 있고 바다가 있다.”​수나라 북평군 노룡현에도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이것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과 전혀 무관한 산이었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이 이후 당나라 평주 노룡현이 되었으므로 정리해 보면 결국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 갈석산과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같은 산으로 볼 수밖에 없다.​비록 두우가 『상서』에 나온 ‘夾右碣石入於河’란 구절을 오독하면서 ‘우갈석’과 ‘좌갈석’이란 개념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두우든 사마정이든 2곳의 갈석산을 언급한 점은 동일하다. 그리고 다시 사마정이 자신이 쓴 주석인 《사기색은》에서 『사기』《하본기》에 대해 주해할 때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부산고구려$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산은 북평군의 갈석산이라 했고 두우는 이것을 ‘우갈석’이라 했다.​『한서』 《지리지》는 대게석산이란 산이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이 갈석산의 위치를 오늘날 중국 하북성 당산시 낙정현이라고 했다. 두우는 『통전』에서 우갈석의 위치를 “강이 바다를 향한 곳으로서 지금의 북평군 남쪽 20여 리에 있다”고 했다. 실제 당산시 낙정현은 진황도시 창려현의 남쪽에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니 기록과 일치한다.​두우가 말한 ‘좌갈석’은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소재​이제 중요한 것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속한 갈석산인 ‘좌갈석’의 위치인데 『통전』 권 178 《주군(州郡)》‘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에선 서진 때 저술된 『태강지리지』에 적힌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이 갈석으로부터 일어난다”를 인용해 “지금 고구려의 옛 땅에 있는 것은 이 갈석이 아니다”고 한 것을 보면 결국 진 장성의 기점인 갈석산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밖에 없다.두우가 언급한 '좌갈석'이자 사마정이 언급한 '낙랑의 갈석산'은 기록을 통해 살펴볼 때 오늘날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지금도 남아 있는 그 갈석산으로 판단된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현재 중국에서 ‘갈석산’이란 이름의 산은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데 구글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북서쪽은 진황도시 노룡현에 속해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창려현에 속해 있다. 따라서 두우가 언급한 ‘좌갈석’이자 진 장성의 기점인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소재의 갈석산이라 볼 수밖에 없다.​애초에 두우가 ‘우갈석’과 ‘좌갈석’ 운운했던 것을 보면 북평의 갈석산과 낙랑의 갈석산이 서로 혼동하기 쉬울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일 노태돈의 주장대로 ‘우갈석’은 오늘날 중국 땅에 있었고 ‘좌갈석’은 한반도 어딘가에 있었다면 굳이 좌우를 써서 구분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구글 지도를 통해 오늘날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의 범위를 살펴보면 갈석산 일부가 노룡현에 속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사마정 역시 북평의 갈석산과 낙랑의 갈석산을 언급하며 하나라 우 임금과 관련된 갈석산은 북평의 갈석산이라 한 것 역시 두 곳이 서로 인접한 곳에 있어서 서로 혼동하기 쉬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통전』 권 178 주군 8 평주의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렇다.​“평주[지금의 노룡현이다.]는 은나라 때엔 고죽국이었다. 춘추시대엔 산융(山戎)과 비자(肥子) 두 나라의 땅이었다.[지금 노룡현이다. 옛 고죽성이 있고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나라이다.] 전국시대엔 연나라에 속했다. 진나라는 우북평군과 요서 2군의 땅으로 삼았고 두 한나라도 그대로 따랐다. 서진은 부산고구려$ 요서군에 속하게 했고 북위는 또 요서군이라 했다. 수나라 초기에 평주를 설치했고 양제(煬帝) 초기에 주를 폐지하고 다시 북평군을 설치했다. 당나라도 이에 따랐다. 거느리는 현은 셋이다.(平州[今理盧龍縣]殷時孤竹國春秋山戎肥子二國地也[今盧龍縣有古孤竹城伯夷叔齊之國也]戰國時屬燕秦爲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二漢因之晉屬遼西郡後魏亦曰遼西郡隋初置平州煬帝初州廢復置北平郡大唐因之領縣三)”​평주는 곧 노룡현인데 그곳이 옛날엔 고죽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하 현이 3개가 있는데 그 중 노룡현의 주석에 앞에서 본대로 그곳이 과거 한나라 요서군 비여현이었으며 갈석산이 있었고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인용해 그곳이 장성의 종점임을 설명하고 있다.​또한 앞서 살펴본 『수서』 권 30 지 25 지리 중 기주(冀州) 북평군(北平郡) 조의 기록에도 수나라 북평군 노룡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던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즉, 당나라 평주 노룡현의 갈석산이 곧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던 갈석산이었고 이것이 두우가 말한 ‘좌갈석’임을 알 수 있다.​다만 『통전』의 권 178 《주군(州郡)》‘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에선 “지금 고구려의 옛 땅에 있는 것은 이 갈석이 아니다”고 했고 같은 책 권 186 《변방(邊防)》 「동이」 고구려 조에는 갈석산이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며 만리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며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을 보면 고구려에는 2개 이상의 갈석산이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그 위치로 볼 때 요령성 조양시 능원현의 갈석산이 고구려에 있었던 또 다른 갈석산으로 추정된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겠지만 이렇게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태강지리지』와 『통전』이 동시대에 편찬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태강지리지』라는 책은 태강(太康)이란 연호를 쓴 서기 280~289년 사이에 저술된 책이라는 것이다.​그리고 『통전』이란 책은 그보다 500여 년 더 늦은 서기 8세기 때 저술된 책이다. 그럼 이 사이에 고구려 영토에 어떠한 변화가 없었을 리 없다. 더군다나 『태강지리지』가 편찬된 시점은 낙랑군의 영토가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는 서기 313년보다 최소 24년, 최대 33년 전이다.​즉, 『태강지리지』는 서기 3세기 말 당시 고구려와 서진의 지리 상황에 맞춰 기록된 것이고 『통전』은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영토 지리에 맞춰 기록된 것이란 뜻이다. 『태강지리지』에서 묘사된 지리적 상황과 『통전』에서 묘사된 지리적 상황은 400여 년의 시차가 있다는 뜻이다. 그 사이에 고구려 영토에 어떤 변화도 없었을 리는 없다.​다시 정리하자면 『태강지리지』에서 언급한 장성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맞다. 그리고 그 밖에 고구려에 이름이 같은 또 다른 갈석산이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이 저술될 당시엔 낙랑군이 아직 고구려에 병합되지 않은 시점이었다.​그렇기 때문에 부산고구려$ 『태강지리지』의 저자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장성의 동쪽 끝인 갈석산은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고 고구려에 있는 갈석산은 이름만 같은 다른 갈석산이라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기 313년에 낙랑군이 고구려에 병합되면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도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이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서기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고구려의 소유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후 두우가 현장을 답사했을 때 옛 고구려 땅이었던 지역에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즉, 고구려 영토 안에는 2개의 갈석산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하나는 장성의 종점인 갈석산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고구려 영토 안에 있었던 또 다른 갈석산이다. 다시 앞의 기록들과 합쳐서 해석해 보면 저 『통전』이란 책에는 총 3개의 갈석산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두우가 노룡현의 기록에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삽입한 이유는 결국 요서군 비여현의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이 같은 곳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당나라의 평주 노룡현이 한나라 요서군 비여현의 갈석산이었고 그곳이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과 같은 곳이라면 결국 낙랑군 수성현 역시 그곳에 있어야 한다. 또 장성의 종점이 된 갈석산이 고구려 영토에 속했다면 마땅히 고구려 영토에 대해서도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두우가 말한 ‘고구려의 옛 땅’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위 기록에서 평주가 은나라 때 고죽국이었다고 했는데 고구려와 고죽국은 어떤 관계였을까? 이 점이 밝혀진다면 이제 더 이상 논란은 무의미하다고 본다.『수서』 권 67 열전 32 배구(裴矩) 조에 배구가 양제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입니다. 주나라 때에 기자(箕子)를 봉했고 한나라 때에 그 땅을 나누어 3군으로 삼았으며 진 씨 역시 요동을 거느렸습니다. 현재 신속(臣屬)되지 않고 별도로 외역(外域)이 되었으니 선제께서 이를 근심하시다가 정벌하고자 하신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하여 출사하였으나 공이 없었습니다.(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于箕子漢世分爲三郡晉氏亦統遼東今乃不臣別爲外域故先帝疾焉欲征之久矣但以楊諒不肖師出無功)”​같은 내용이 『구당서』, 『신당서』 열전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실려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고구려의 땅이 본래 고죽국이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적어도 수나라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고죽국의 땅이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수서』 권 67 열전 32 배구(裴矩) 조엔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은 곧 당시까지만 해도 옛 고죽국이 고구려 영토에 속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부산고구려$ 조하준 기자)고죽국이 노룡현에 있었고 그 노룡현에 갈석산이 있었으며 갈석산에서 장성이 끝난다고 했으니 당연히 장성을 직접 답사한 두우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두우가 말한 ‘고구려의 옛 땅’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두우가 말하는 요수 역시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노룡현 서쪽의 난하일 가능성이 더 크다. 두우는 그곳이 본래 고구려 영토였기에 “갈석산은 고구려의 옛 땅에 있다.”고 아무 편견 없이 언급한 것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국 영토를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었던 중국 어용학자들과 양보심이 넘쳐 우리 땅을 알아서 내주는 한국 주류 강단사학자들만이 기록을 보고도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조(서기 612년)에도 수 양제 양광이 고구려 침공에 앞서 조서를 낭독할 때에도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고구려 하찮은 놈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해 발해와 갈석 사이에 군중을 모으고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였다.(高句麗小醜迷昏不恭崇聚渤碣之間荐食遼濊之境)”​여기서도 역시 발해와 갈석산 사이 지역이 고구려 영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갈석산은 당연히 수나라가 자국 영토의 끝으로 간주한 장성의 종점인 갈석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서기 612년 수 양제 양광이 113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그가 언급한 발해와 갈석의 위치를 고려할 때 고구려의 영토가 어디까지 미쳤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 조(서기 644년)에도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침공에 앞서 발표한 조서에 위와 비슷한 말이 적혀 있다.​“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니 인정 상 어찌 참을 수 있으리오? 지금 유주와 계주를 순행하여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묻고자 한다.(以高句麗蓋蘇文弑主虐民情何可忍今欲巡幸幽薊問罪遼碣)”​유주와 계주를 순행해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묻겠다고 이세민이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곧 요동과 갈석이란 곳이 유주, 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당나라 때 유주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탁주시 일대를 말하고 계주는 천진시 계주구를 말한다. 모두 오늘날 북경 근처에 있는 지역이다.서기 644년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침공을 하기 전 발표한 조서에 언급된 유주와 계주를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만약 위 기록에서 나온 요동이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요하 동쪽이라면 유주와 계주를 순행하여 가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국사학계에서 고구려 요동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요령성 부산고구려$ 요양시에서 천진시 계주구까지 거리는 직선거리만 해도 약 510km에 달하는데 이는 부산광역시에서 평양까지 직선거리와 맞먹는 거리다.​더 가까운 지명을 놔두고 이렇게 멀리 떨어진 지명을 언급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요동과 갈석을 언급한 이유는 분명히 그 두 곳이 고구려를 대표하는 지명이기 때문일 것인데 오늘날 요동 지방엔 갈석산이라 불린 산이 없다. 왜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인가?​반면에 앞서 말한 옛 고죽국 지역인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옮겨놓고 보면 어떤가? 천진시 계주구에서 갈석산까지 거리는 148km 정도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고 유주와 계주 지역을 거쳐 동쪽으로 가면 충분히 닿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세민이 말한 요동 지역 역시 갈석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또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엔 고구려 요동성이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평성은 요동군의 치소였던 요동군 양평현을 말한다. 우리는 이곳을 요령성 요양시라고 알고 있지만 『한서』, 『후한서』 두 책 지리지에는 모두 양평현과 요양현이 따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양평이 요령성 요양시가 될 수 있을까?​그리고 『후한서』 권 74 하 《원소(袁紹)․유표(劉表) 열전》 제 64 하 주석에 양평현에 대해서 이렇게 주해하고 있다.​“양평은 현이며 요동군에 속했다. 옛 성이 오늘날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襄平縣屬遼東郡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이 주석은 당나라 고종(高宗)의 아들인 이현(李賢)이 주해한 것이다. 위 기록에 나온 ‘오늘날’은 바로 당나라 때를 말하는 것이다. 양평성이 당나라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앞서 말했듯이 평주 노룡현은 과거 고죽국의 옛 땅이었던 곳으로 장성의 기점이 된 갈석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겠는가?​그리고 이 양평성이 곧 고구려의 요동성이라고 했으니 결국 고구려 요동성은 요령성 요양시가 아니라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서남쪽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곳이 본래 고죽국이 있었던 곳이었고 이후 고구려 영토가 되었기에 중국에서도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고 했던 것이다.​갈석산은 평주 노룡현에 있는데 그 노룡현 서남쪽에 훗날 요동성이 된 한나라 양평성이 있었으니 역으로 말해 요동성 동북쪽에 갈석산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두우가 갈석산이 고구려 영토에 있었고 장성이 요수를 끊고 동쪽으로 고구려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상으로 볼 때 고구려의 영토는 적어도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 일대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강단사학자들은 제멋대로 요수(遼水)를 지금의 요하에다 갖다 붙여서 스스로 고구려의 영토를 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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